리뷰
라씨에이
2024.08.11
8.7/그 자리의 누구도 죽이지 않은 리볼버 한 자루가 끝내버린 비장한 면면들 간 소탈한 전쟁.
8.7/그 자리의 누구도 죽이지 않은 리볼버 한 자루가 끝내버린 비장한 면면들 간 소탈한 전쟁. / 이토록 깔끔하고 흥미진진한 용두사미라니. 모두가 윈윈까진 아니어도 모두들 최악은 면한 채로 이렇다 할 사건, 뒤끝도 없이 거의 모든 갈등이 일단락됐음. 돈 받을 사람은 돈을 받았고, 돈 줄 사람도 돈을 줬고, 이리저리 얽힌 사람들도 다들 목숨은 온전히 건졌으니 그거면 된 것 같고, 영화도 딱 거기까지만 보여주고서 깔끔하게 끝남. 임 과장의 죽음이나 황정미의 시체, 본부장의 의미심장한 표정 등에 얽힌 비리나 음모 따위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급 영향력을 행사한 모자 지간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퍼포먼스를 통해 퉁쳐버리며 더이상 묻고 따질 필요 자체를 아예 없애버림. 개인적으로 영화 <아수라>의 엔딩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가 얽히고 설킨 모든 인물들이 아수라장 속에서 싹 다 죽어버려서 뒷일이고 뭐고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였는데, 이 영화는 그와는 정반대나 다름없는, 모두가 무사히 제 발과 휠체어로 퇴장하는 마무리를 보여줬음에도 <아수라>에서처럼 뒷일이나 뒤끝을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상당히 의외면서도 마음에 쏙 들었음. 하여간 그렇게 비장하고 심상치 않은 톤과 표정으로 시작해서 이토록 싱겁고 허무하게 끝나버렸음에도 시원하고 후련할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좀 놀라울 지경이었고, 막판의 전개가 통째로 클리셰를 비틀어 버리는 영리한 한 수라 느껴졌음. / 이미 죽어있던 사람을 제외하곤 얽혀있는 인물들 중 누구 하나 죽지 않았음은 물론, 주인공은 받을 돈 받고, 아파트까지 건지며 유유히 퇴장했음. 솔직히 주인공이 앤디 패거리에게 둘러싸일 때까지만 해도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엔딩만을 예상했는데, 그렇게 극적이고 극단적인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고도 영화는 적당한 선에서 깔끔하게 갈등을 일단락지어냈음. 그리고 여기에는 7억의 현금과 15억 상당의 아파트 한 채란 설정도 한 몫을 했다 싶었음. 막 시체를 유기하고, 사람을 자살시키기도 하는 등, 수십, 수백 억 단위는 우습게 오갈 것 같은 거물이 끼어있는 판에서 7억 현금과 15억 아파트는 그 스케일이 좀 애매하지 않나 싶었는데, 극중 대사처럼 많지도, 적지도 않은 액수이기에 오히려 이런 식의 허무한 결말을 맞았음에도 충분히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 있었고, 깔끔하게 복수고 뒷처리고 단념해버린 흑막의 선택 또한 납득할 수 있었음. / 후반 얽혀있는 인물들이 한데 모여서 벌이는 긴장감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헐렁하고 은근 병맛스럽기도 한 대치상황이자 촌극은 그 자체로 상당한 완성도와 재미를 선사했음. 여전히 심각한 톤은 유지하되, 자꾸만 예상을 조금씩 벗어나는 광경들이 펼쳐지고, 이것들이 모여서 뜻밖의 결말에 도달하는데, 대체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취향에는 들어맞아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음. 다만 거기에까지 이르게 되는 중간 과정이 좀 생략됐단 느낌이 들긴 했음. 주인공이 이사람 저사람 만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차근차근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쌓아가는데, 아직 그 뒤로 관계와 갈등이 더 고조돼야 할 것 같음에도 별안간 모두가 한데 모여 대치하는 클라이맥스로 이어져 버려서 한동안 좀 어리둥절했음. 앤디가 도로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앉아서 씨익 웃어보일 때까지만 해도 주인공이 여차저차해서 일단 위기를 모면한 후에 준비를 마치고 본진으로 쳐들어가겠지 했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거의 모든 숙제들을 해결해 버리는 걸 보고 좀 당황스럽긴 했음. 뭔가 중간보스를 열심히 상대하고 있는 와중에 별안간 밑에 '사실 얘가 끝판왕임!'이란 자막이 떠버린 느낌이랄까. 물론 결국엔 만족해 버렸기에 마이너스 요소보다는 변칙적인 전개 방식, 클리셰 비틀기를 위한 도움닫기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그래도 조금만 삐끗했으면 치명적인 단점이 됐을 수도 있겠다 싶었음. / 받기로 한 돈을 못 받아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놓인 주인공이 돈을 받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여러 정보들이 쏟아짐. 특히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매칭시킬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로 새로운 이름들이 자꾸만 튀어나와서 좀 당혹스러웠는데, 새로운 이름이 언급되면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해당 인물이 등판하고, 생각보다 명료하게 자기 할 말, 혹은 할 일만 하고 퇴장해 주기에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있어 딱히 방해가 되진 않았음. 오히려 여러 인물들과 이해관계가 얽혀서 지들끼리 반목과 배신을 일삼으며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고, 하나하나 단서를 찾아 퍼즐 맞추듯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추리물스러운 흐름을 즐기는 맛도 있었음. 이런저런 사건들이 얽히고 설키는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론 받아야 할 돈을 받기 위해 움직인다는 주인공의 목적처럼 명료할 따름이어서 막 복잡하게 꼬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음. / 전혀 정보가 없었는데 별안간 이정재가 나와버림. 물론 비중이 많이 크진 않았지만, 이야기 곳곳에서 수시로 언급되거나 의외의 타이밍에 얼굴을 비추는 등, 묘한 흔적과 단서들을 남기며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고, 미스터리 또한 짙게 남겨줬음. 초반부터 전도연과 이정재가 나란히 서있는 뜻밖의 투샷을 마주하니 뭔가 영화의 품격 같은 게 확 올라가는 느낌이었고, 느와르적인 분위기가 확 깊어지기도 했음. 신출귀몰하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흘리고 다니는 폼이 <화차> 속 김민희를 떠올리게 했고, 뭔가 감독의 전작 <무뢰한> 속 김남길의 분위기도 풍기는 듯해서 두 사람의 투샷이 은근 익숙하게 느껴졌음. 하수영과 과거의 인연으로 얽혀있는 듯 뭔가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정재영도 등판하는데, 역시나 뜻밖의 걸출한 얼굴이라 이정재에 이어 느와르 분위기를 재차 끌어올려줬음. 그밖에도 정만식, 김종수, 전혜진, 김혜은, 양현민 등 의외의 큰 얼굴들이 비교적 짧지만 굵직한 역할을 맡아 적재적소에서 각자만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옹골찬 활약들을 보여줬음. 주연 3인방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캐스팅이 빵빵했고, 그 활용도 충분히 성공적이었음. / 하수영을 연기한 전도연은 분명 뒤가 구린 놈들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가 낙동강 오리알에 개털 신세가 돼버린 지라 되게 똥줄 타는 입장이어야 마땅함에도 내내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지는 듯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극을 여유롭게 끌고 갔음. 이따금씩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울분, 당혹감, 두려움 등을 내비치지만, 이내 다시금 절제하고서 묵묵히 여기저기 누빈 끝에 목표한 바를 얻어내고, 무덤덤한 표정 뒤 절실한 성취의 기쁨을 등 뒤의 파도로 대신 드러내며 덤덤하게 퇴장함. 화장기 없는 얼굴에 히메컷을 하고 화려한 자수 무늬가 새겨진 트랙 자켓을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삼단봉을 휘두르는 중년 여성의 비주얼은 그 자체로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겨냈고, 동시에 적어도 그 끝에 비굴함, 굴종 따윈 없을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음. / 연거푸 세 통의 전화를 걸어 각기 다른 톤과 말투로 처리하는 모습으로 대변되는 임지연의 윤선은 여러 종의 고래들 사이에서 등이 터져버리기 직전까지 몰린 화려한 꽃무늬의 새우 포지션이었음. 어디에 붙을지 갈팡질팡 내내 갈피를 못 잡다가 문득 차에 올라탄 채로 닥치고 돌진을 시전하고서 냅다 하수영(전도연) 짱짱걸을 시전해 버리는데, 그런 모습들이 좀 오락가락 개연성 없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임지연의 지랄맞을 정도의 발랄하고 능글맞고 푼수 같아 보이는 연기 덕에 오히려 통통 튀는 매력으로 느껴졌고, 후반부엔 상당한 웃음 포인트가 돼줬음. 지창욱이 연기한 앤디는 첫등장까지만 해도 말쑥하고 핸섬한 비주얼과 의미심장해 보이는 표정 때문에 분명 실력이든 광기든 대단한 뭔가를 숨긴 인물일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냥 개망나니 부잣집 철부지 도련님일 뿐이었음. 말 끝마다 년년 거리며 욕을 달고 사는 상스러운 사고뭉치 철부지로서의 면모가 한껏 부각된 덕에 막판 그레이스의 체념 섞인 엄마 모드에 상당한 설득력이 실렸고, 하수영의 무사 귀환까지도 가능케 해줬음. 물론 그런 와중에도 만만치만은 않아 보이는 일말의 카리스마와 함께 빌런 역할도 적당히 수행해줬음. 김준한 배우는 솔직히 아직까지도 왠지 모를 가볍고 경솔한 이미지가 떨쳐지질 않고 있지만, 적어도 여기선 막판 잠시나마 극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묵직한 모습을 보여줬음. 막판 일단은 앞선 장면에서와 비슷하게 껄렁거리며 가벼운 폼으로 등장하는데, 이내 손에 총을 쥐고는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은 꽤나 미쳐있는 표정으로 몇 분이나마 주인공을 비롯한 모두를 압도하고 압박하며 나름의 카리스마를 발휘해냄. 개인적으로 지금껏 봐온 김준한 배우의 모습들 중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연기였음.
